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알아보자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의미는 무엇일까?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은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자율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정한 기념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학생들이 참여한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운동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의미 알아보기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은 1929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며 매년 11월 3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광주 항일학생운동은 약 5개월간 지속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전국 194개 학교 약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학생들의 시위운동입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 이날을 정부기념일 학생의 날로 최초 제정하였고 1973년 기념일 통폐합으로 폐지되었다가 1984년 다시 제정되었으며 2006년에는 기념일의 명칭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하였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일제식민지정책에 항거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이날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뜻깊은 날입니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갈등이 큰 다툼으로 커져서 학생 단위의 큰 시위가 되었고 일본 경찰의 차별적인 대우가 그 규모를 더욱 키워 전국으로 확산시켰습니다. 이 운동은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전국에서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항일운동입니다.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 배경 알아보기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가 20년 정도 흐르게 된 1929년 우리나라에 상시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일본인 학생들의 수도 많아졌습니다. 일본인 학생들도 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이 일본인만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많이 설립되었고 기존에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들도 있기는 했지만 일본인 학생만 없을 뿐 교장이나 주요 임원진들은 주로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각종 식빈지 교육과 차별대우가 자행되었습니다. 분리 교육에 따른 차별이 발생했고 일본인만 다니는 학교와 조선인만 다니는 학교의 충돌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충돌이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 광주 중학교 학생들의 충돌을 계기로 더욱 커져 항일운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집단 싸움이 발생했고 이것을 말리러 파견된 일본인 경찰이 편파적으로 일본인 학생 편만 들고 조선인 학생의 따귀를 때리는 등 구타를 하는 차별대우를 자행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광주 시내의 각 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한 투쟁에 동참하게 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어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일본 경찰은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우리 학생을 75명이나 체포하는 반면 일본 학생은 10명 정도만 잡아가는 시늉만 하고 임시 휴교 처분 학생 운동의 철저한 탄압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일본 경찰의 대응에 분노한 국민들이 학생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의 항일운동 참여까지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시위 참여 학생 무기정학, 학교 무기 휴교, 언론 탄압과 같이 더 강력히 대응했고 일본 경찰의 이러한 실태가 훗날 신간회의 도움과 보도 탄압의 해제로 전국 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약 5만 4,000여 명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나라를 잃은 아픔과 차별적인 대우에 굴하지 않고 전국의 학생들이 일어나 항일운동을 하는 용기와 독립정신을 떠올리며 숭고한 민족정신을 되새겨보는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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